모스크바 3상 회의의 내용과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Ⅰ.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배경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Cairo)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 및 세계 정세의 논의를 위해 미국·영국·중화민국의 수뇌부가 회담을 가졌다. 이 때 일본의 불법적인 영토 침탈 문제와 그 해결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대한민국의 자유 독립이 원칙적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이는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1943)에 의해 국제적으로 보장되기에 이른다. 다만 카이로 선언은 원칙적인 합의에 그쳤을 뿐, 세부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해서는 논의되지 않았기에 카이로 선언에서 합의된 원칙의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안의 마련을 위하여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Moscow)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의 외교 담당자들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2.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주요 내용
(1) 1947 파리 조약
1947년 2월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21개국)과 추축국, 핀란드 간에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체결된 조약으로 패전국들의 군비 제한과 승전국에 대한 배상금 지불, 영토의 할양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의 초안이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에서 논의되었다.
(2) 한국의 독립에 관한 논의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에서는 극동 지역에 관한 내용, 특히 한국의 독립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었는데, 10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미국측과 즉각 독립을 주장한 소련의 의견이 엇갈렸고, 최종적으로는 '한반도 단일 임시정부에 의한 5년의 신탁통치' 가 합의안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동아일보를 비롯한 한국 신문사들이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뒤바꾸어 전달하는 오보가 국내에 전해지며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 / 반대로 갈등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다시 좌 / 우 이념갈등으로 발전, 좌우 대립이 심화된 결과로 심각한 사회 혼란을 겪게 되었으며 제1차 / 제2차 미소 공동위가 결렬되고 결과적으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Ⅱ.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대한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1. 북한의 대응
북한의 경우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고, 신탁통치가 아닌 후견(опека)이라는 프레이밍이 성공하여 주민 대부분이 찬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우파 및 기독교 세력은 반탁 의견을 표명하였으나 소련과 북조선노동당의 탄압, 회유에 의해 월남하거나 찬탁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북한에서의 우익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2. 남한 내 좌익 세력의 대응
본래 좌익 세력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자마자 연합국에 의한 식민지배가 이어지게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조선공산당의 공식 입장으로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좌익 세력 내 주류였던 공산·사회주의 계열이 '신탁통치' 보다는 '한반도 단일 임시정부' 에 주안점을 두고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자 중도 좌파 민족주의 계열 세력이 좌파 세력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3. 우익 세력의 대응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며 단일 정부 수립을 주장한 민족주의 계열과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반 사회주의 진영은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신탁통치=외세 개입'의 프레임을 만들어 좌익 세력을 반민족주의 세력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활용하였다.
Ⅲ. 결과
좌 / 우 세력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가한 정당 및 단체, 인사들을 배제할 것을 주장하면서 한반도 단일 임시정부 수립이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후 소련측이 협상안을 제안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우익 세력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미국측의 일방적인 담화에 소련이 이의를 제기하며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다.
이후 1947년 4월, 약 1년만에 재개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역시 협의 대상을 논의하는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협의를 청원한 단체 전부를 협의대상으로 포함하기를 주장하는 미국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탁 투쟁 단체를 제외할 것을 주장하는 소련간의 입장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고, 미국 측에 의해 한국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한 문제가 UN 총회에 상정되어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이후 1948년 5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남한의 단독선거로 실시, 동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선포하며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